[스크랩] 장작불 지피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까!
추위는 자연이 주는 “순환(循還)”의 원리인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국내외 정치의 엄혹한 한파는 물러갈 줄 모르고 한겨울이다.
오늘날 첨예한 갈등과 대립으로 국운이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국제정세,
지연과 제재 및 군사옵션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비핵화'에 관한 불신의 미북관계,
특히 미중의 치열한 무역전쟁 및 상호불신의 외교 불안.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북정책이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로 김정은은 금년 상반기에는 스스로 비핵화
의지를 천명하고 나섰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조차
불분명한 상태에서 UN및 국제사회의 제재완화를 요구하며
종전선언이나 평화선언을 줄 곳 압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나 진전이 없음에도 우리정부는 오히려 미국이나
국제사회를 다니면서 북한을 대변하고 대내적으로 북한미화에 앞장서며
더욱 전방위로 국방력 약화와 안보태세까지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 국제분위기인데도 우리나라는
군축 등 국방력 감퇴와 친북으로 쏠린 외교, 국방, 경제정책으로 인한 안보불안,
최저임금인상, 근로시간단축, 청년일자리 고용불안, 기업인의 불만고조 등 경제침체,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권의 믿을 수 없는 안보와 좌파편향의 포퓰리즘 정책,
정치권의 갈등과 협치 실종으로 극한 대립과 갈길 잃은 정치계의 혼란과 무능,
이념과 이해관계에만 몰두, 국가와 국민을 생각 않는 사회이익단체와 노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국방, 공직사회 등 만연된 편 가르기 및 적폐청산,
잘못을 “내 탓 아닌 네 탓”, “내로 남불”로 공격해 버리는 사회풍조, 등
요즈음은 눈만 떴다 하면, 이러한 사람들과 소식을 매스껍도록 많이 만난다.
뉴스나 신문을 접하다가 어딘가 피하고 싶고, 두려워 도망치고 싶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고 앞이 보이지 않아 가슴이 답답하고 어둡다.
이러하니 오늘날, 우리사회의 미래지표는 그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다.
‘자유, 민주, 평화’라는 대한민국의 기본가치가 위기를 맞고 있다.
주요정책의 급진적인 변화로 70년간 구축해온 국가정체성과
한국 현대사의 틀이 뿌리 채 흔들린다.
한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이 흔들리면 그 백성들의 삶도 흔들리고
자유로운 생활과 문화 및 종교생활 또한 보장되지 않는다.
또한 경제분야에서도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근로시간의 단축으로
개인 및 소기업은 폐업하거나 최악의 불황에 빠져있고,
정부주도의 인위적인 일자리창출과 비 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로
공기업과 대기업은 몸살을 앓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호황과는 달리
우리나라 경제는 침체에 빠지고 경제지표 또한 하향곡선이다.
그러나 세월은 세상사와 인간사에 아랑곳 없이 흘러 가을은 11월의 끝자락 등을 타고 저 산 너머로 열흘 전 가버렸다. 12월이 열린 겨울의 첫 길목의 영하의 추위는 춥다 못해 벌써부터 시퍼렇다. 서재의 창 너머로 보이는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상념의 날개를 띄워 그 옛날, 어릴 쩍 자라던 그 시절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향수에 깊이 잠긴다
특히 부엌과 마당에 쌓여있던 장작더미와 연탄이 생각난다 고향, 옛 우리 집 마당에 쌓여있던 장작더미가 보이며 따뜻한 구들목이 그립다. 겨울채비에 바쁠 때는 덜 마른 나무라도 많이 쪼개어 쌓아 놓아야 마음 푸근하다. 뒤란이며 마당 귀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장작은 겨울양식같이 든든했다.
또 그뿐인가, 우리네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면서 앞마당 곳간이나 부엌 한 켠에 쌓아 놓은 것이 시커먼 연탄이었다. 좁은 길에는 연탄 가득 실은 1.5톤 트럭에, 또는 골목이나 비탈오르막에는 손수레에 연탄 가득 싣고 씩씩거리던 아저씨들의 검은 연탄가루 묻은 시커먼 얼굴이 생각난다. 집안구석 어디든지 함석이나 가마니로 덮어 놓은 연탄이 우리의 키보다 높이 쌓여 있어야 부자 마음이었다.
옹기종기 붙은 초가 집집마다 지붕 위 굴뚝으로 나오는 연기만 보아도 장작불인지 연탄 지피는 불인지 우리의 눈은 구분할 수 있었다.
장작의 나무들 속살이며 무늬도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지금은 깊은 산골 오두막이나 절 마당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연탄의 가지런한 열아홉 개의 구멍에서 일렁이던 파랑불꽃은 따사로운 예술품이었다. 요즈음은 달동네나 공사현장, 공장 뒷마당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런 장작과 연탄은 불이요 꽃이며 활력소다. 보고 있으면 모닥불처럼, 화로처럼 뜨거워지고 추억이 새록새록 다가온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처럼 ‘그대에게 가는 길’과 ‘그대 곁에 남는 길’과 ‘그대 안에 이르는 길’이 다르다. 제 길로 각각 다른 길로 가다가 이 장작불과 연탄불로 다 모이는가 보다. 자신의 몸을 다 태워 ‘기어이 재’가 되는 길을 택한다.
기웃거리는 다수 인간군상들의 모습과는 다른, 전소(全燒)의 깨끗한 헌신과 사랑으로 주위를 밝히며 덥힌다. 오늘날, 아군과 적군으로 대치의 진(陳)을 쌓고 끝없는 갈등과 공격을 일삼는 정치계를 비롯한 각계 사회상을 바라보면서, 그 옛날의 장작불과 연탄불이 그립다.
찬바람이 드셀수록 장작불을 함께 쬐던 군고구마 같은 옛 벗들과 연탄불 구들목 이불 속에 발 묻고 웃으며 재잘거리던 어릴 쩍 가족이 그립다. 그런 따사롭고 정겨운 광경이 그립고, 푸근하고 찐빵 같은 그런 마음 또한 그립다. 아~ 따뜻하고 평화롭고 행복했던 그 시절로 다시 되돌아 갈수는 없을까!
장작 정경화(1961~ )
그대에게 가는 길은 내 절반을 쪼개는 일 시퍼런 도끼 날이 숲을 죄다 흔들어도 하얗게 드러난 살결은 흰 꽃처럼 부시다
그대 곁에 남는 길은 불씨 한 점 살리는 일 바람이 외줄을 타는 곡예 같은 춤사위에 외마디 비명을 감춘 채 아낌없이 사위어 간다
그대 안에 이르는 길은 기어이 재가 되는 일 화농으로 굳은 상처 달빛으로 닦아 보면 비로소 쌓이는 적멸. 솔씨 하나 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