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말이다.
囊 : 주머니 낭
中 : 가운데 중
之 : 어조사 지
錐 : 송곳 추
(유의어)
계군고학(鷄群孤鶴)
계군일학(鷄群一鶴)
군계일학(群鷄一鶴)
발군(拔群)
백미(白眉)
절윤(絶倫)
추낭(錐囊)
추처낭중(錐處囊中)
출중(出衆)
낭중(囊中)은 주머니 속이란 뜻이고, 추(錐)는 송곳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속에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원래 주머니 속에 넣은 뾰족한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그 끝이 주머니를 뚫고 비어져 나온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나게 된다. 또는 아무리 감추려 하나 숨겨지지 아니하고 저절로 드러나 선악을 가리게 된다.
사기(史記) 평원군전(平原君傳)에 평원군(平原君)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현사(賢士)가 세상에 처함에는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아 곧 그 인격이 알려지게 된다”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조(趙)나라의 평원군은 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되었다. 그래서 초(楚)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식객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사람 20명을 뽑아 동행하고자 했지만 한 사람이 부족했다. 그 때 모수(毛遂)가 자천(自薦)하자, 평원군이 “대저 현명한 선비가 세상을 대처함은 비유컨데 송곳이 주머니 속에 처하여 그 끝이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선생이 내 집에 들어와서 여기에서 3년이 되었다. 내가 들은바가 없으니 이것은 선생이 가진 재주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자
모수가 “오늘 처음으로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는 것입니다. 일찍 주머니 속에 넣어 주셨더라면 송곳 자루까지 나와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평원군은 결국 그를 사신으로 데려갔다. 이후 모수는 초(楚)나라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큰 역할을 했고 두 나라는 혈맹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평원군은 그를 상객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부터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드러난다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동의어로는 추낭(錐囊)이 있고, 원래 말은 추처낭중(錐處囊中)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드러나지 않았던 진짜 인재(人才)
이번 고사성어는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의 낭중지추(囊中之錐)이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송곳은 그 존재를 아무리 숨기려 해도 끝이 뾰족한 탓에 밖으로 비어져 나오게 마련인데, 그처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실린 일화를 통해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아보자.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이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송곳은 그 존재를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끝이 뾰족한 탓에 밖으로 비어져 나오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야기가 실려 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을 보면 그 반대의 상황에서 이 말이 생겨났다.
평원군의 식객이었던 모수(毛遂)는 훌륭한 인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추천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던 것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마천의 기록을 읽어보자.
평원군 조승(趙勝)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공자였다. 공자(公子)는 제후의 자제를 뜻하는 말이다. 그는 혜문왕(惠文王)의 동생이었고 산동성(山東省) 평원현(平原縣) 지역에 봉해졌으므로 평원군(平原君)이라 불렸다. 여러 공자들 중에서 조승이 가장 어질고 빈객을 좋아하여 그 문하에 모여든 식객이 대략 수천 명이나 됐다고 한다.
평원군은 조나라 혜문왕과 효성왕(孝成王)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세 차례나 재상 자리를 떠났다가 세 차례 다시 재상 자리에 올랐다. 재상 자리에 세 번이나 오르고 그 밑에 모여든 빈객이 수천이라 했으니, 평원군은 능력과 인품을 겸비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평원군의 문하에 있던 모수(毛遂)는 수천 명의 식객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고, 평원군은 애초에 그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평원군이 모수를 알아보게 된 데에는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당시 힘이 막강했던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위기상황을 맞은 조(趙)나라는 평원군을 보내 초(楚)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동맹을 맺도록 했다. 평원군은 문하의 식객들 중에서 용기와 힘이 있고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람 스무 명을 뽑아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평원군은 열아홉 명을 선발했지만, 나머지 한 명은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스무 명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식객으로 있던 모수가 앞으로 나서서 스스로 자신을 추천하며 평원군에게 말했다. “당신은 초나라와 합종 맹약을 맺기 위하여 문하의 식객 스무 명과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사람을 밖에서 찾지 않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모자라니, 저를 그 일행에 끼워 주십시오.”
참으로 당돌하다. 겸양이 미덕인 시대에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이렇게 나선다는 것은 당시 매우 드문 일이었을 터. 평원군도 놀랐는지 모수에게 대뜸 묻는다. “선생은 내 빈객으로 있은 지 몇 해나 되었소?” “3년 됐습니다.”
평원군이 말했다. “대체로 훌륭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빈객으로 3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나 또한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소. 이것은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것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
만일 내가 모수라면,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어떨까. 기가 죽을 만하다. 평원군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신과 그 주위 사람들이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평원군이 모수에 대해 내린 결론, ‘당신은 재능이 없다’고 한 말은 옳았을까.
모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저는 오늘에서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를 좀 더 일찍이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송곳 끝뿐만 아니라 그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마침내 평원군은 모수와 함께 가기로 했다. 이미 뽑힌 열아홉 명은 모수를 업신여겨 서로 눈짓하며 비웃었으나 입 밖으로 그런 마음을 말하지는 않았다. 모수는 초(楚)나라에 가는 동안 그 열아홉 명과 논쟁을 벌였는데, 그들이 모두 탄복했다.
평원군은 초왕(楚王)을 만나, 합종을 할 경우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초왕은 망설였다. 논의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했는데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열아홉 명의 빈객이 모수에게 말했다. “선생이 당(堂) 위로 올라가시오.”
모수는 칼자루를 잡은 채 계단을 뛰어올라 평원군에게 말했다. “합종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에 대해서는 두 마디면 결정되는데, 해가 뜰 무렵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한낮이 되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초왕이 평원군에게 물었다. “저 손님은 누구입니까?” 평원군이 답했다. “저 사람은 저의 사인(舍人 귀족의 측근이나 하인에 대한 통칭)입니다.” 초왕은 큰 소리로 모수를 꾸짖었다. “썩 내려가시오. 나는 그대의 주인과 이야기하는 중인데, 이게 무슨 짓이오?”
모수는 칼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왕께서 저를 꾸짖는 것은 초나라 병사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왕께서는 열 걸음 안에서 초나라 병사가 많은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왕의 목숨은 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이 말을 듣고 초왕은 식겁했을 것이다. 모수가 지금 칼을 쥐고서 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은나라 탕왕은 70리의 땅을 가지고 천하의 왕이 되었고, 주나라 문왕은 100리의 땅을 가지고 제후를 신하로 삼았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병사가 많았기 때문이겠습니까? 정녕 세력에 의지하여 그 위엄을 떨쳤기 때문입니다. 지금 초나라 땅은 사방 5,000리이고, 창을 가진 병사가 백만이나 됩니다. 이것은 천하의 우두머리로서 왕이 될 수 있는 바탕입니다. 천하에 초나라의 강대함에 맞설 만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진나라 장군 백기와 같이 형편없는 자가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와 한번 싸워 언과 영을 빼앗고, 두 번 싸워서 이릉(夷陵 초나라 선왕의 능묘)을 불사르고, 세 번 싸워서 왕의 조상을 욕보였습니다. 이것은 초나라에게는 백 대가 지나도록 잊을 수 없는 원통한 일이며, 조나라에서도 초나라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이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계십니다. 합종은 초나라를 위한 일이지 조나라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초왕은 그의 말에 수긍하고 합종을 결정했다.
조나라로 돌아온 평원군은 부끄러웠을 것이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선비를 고른 수는 많다면 천 명이 될 것이고, 적어도 백여 명은 될 것이다. 나는 스스로 천하의 선비를 잃은 적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이번 모 선생의 경우에는 실수하였다.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백만 명의 군사보다도 강했다. 나는 감히 다시는 인물을 평가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마침내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삼았다. 평원군 일행이 떠난 즉시 초왕은 구원병을 급파했고, 진나라는 초나라의 구원병이 온다는 말을 듣자 미리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 버렸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능력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평원군 같이 어질고 안목이 있는 사람도 모수 같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훌륭한 인재가 꼭 낭중지추(囊中之錐)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때로는 모수처럼 스스로 나서는 용기도 필요하겠다. 무엇보다 그의 재능은 군사력(武)이 아닌 외교력(文)으로 전쟁을 막은 데서 드러났다. 스스로를 추천한 후에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면 모수자천(毛遂自薦)이란 말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낭중지추란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인데, 곧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드러나지만 나쁜 점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겉으로는 진실한 것처럼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거짓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거짓은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진실된 마음이든 거짓된 마음이든 속에 있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거짓은 숨기려고 하는 것으로 정체를 드러내어 거짓말의 필요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지만 진실은 침묵해도 웅변을 능가하는 설득력을 나타냅니다. 거짓은 사람을 추하고 악하게 만들지만 진실은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위엄 있게 합니다.
화려한 겉모습, 언뜻 보아 신령한 것 같고 인격적인 것 같은 소위 지도급 인사들의 뒷주머니를 뚫고 나온 송곳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명분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영적, 도덕적으로 파산한 이들이 사회 안에도 왜 이리 많은지, 이런 자들과 단순히 세속적 깊은 관련을 끊지 못해 진리를 배척하고 교회를 훼방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한 없이 어리석고 불쌍한 이들이 있습니다.
거짓과 편법으로 지혜를 삼는 지도자들, 진리와 정당성에 대한 고려 없이 패거리 의식으로 교회 안에서 분탕질을 하는 직분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복하려는 테러리스터들이 분명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직이 있어야 하고 모든 언행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정직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필요에 따라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하면 편할 텐데 굳이 정직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직하게 사는 것은 힘듭니다.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슬쩍 슬쩍 속이면 우선은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굳이 정직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말과 속이는 것이 나쁜 것은 그 결과가 모두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속이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아무리 이름 있는 목사나 유력한 장로나 재능 있는 집사라고 하여도 거짓말 하고 속이는 것으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는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정직함과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정직한 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겉으로만 진실한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는 진실을 원하십니다.
시편 51:6절에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라고 하였는데, 진실함은 그 성격상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드러내고 떠드는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로 보아 자랑하고 자기를 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자는 진실 된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 선생은 어릴 적에 아버지가 아끼던 벼루를 깨트렸습니다. 그 때 하인들이 안중근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깼다고 할 테니까 도련님은 아무 말하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하인들의 그 제안에 “내가 깼는데 왜 너희들이 깼다고 하느냐?”며 하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씀을 드려서 호되게 매를 맞았습니다.
하인들이 안타깝다는 듯이 매를 맞고 난 안중근에게 말했습니다. “도련님, 우리가 깨트렸다고 하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얼마나 아프십니까?”라고 위로하자 어린 안중근이 그랬다고 합니다. “다리는 아프다만 마음은 편하다.” 깊이 새겨 볼 말입니다.
정직을 위해서는 불편한 것을 좀 감수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않게 사는 것은 쉽습니다. 적당히 거짓말 하고 적당히 나쁜 짓 하고 사람들을 속이고 살면 우선은 쉽습니다. 하지만 쉽다고 정직하지 않게 살고 거짓말 하고 남을 속이는 것은 똑똑한 것 같지만 그게 바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우선은 불편합니다. 시간이 더 걸리고, 돈도 손해보고, 속도 상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하는 데는 목적이 없습니다. 정직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정직하면 복 받고 잘 된다는 어떤 보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복을 못 받아도 정직해야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짓고 몹시도 괴로워 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죄이기 때문에 숨기고 싶었습니다. 부하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여자가 임신을 하자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고 남편의 아이로 믿게 하기 위해서 전장에 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아내와 자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온 나라가 전쟁 중인데 편하게 아내와 잘 수 없다고 하면서 밖에서 잠을 잤습니다. 다윗은 그 계략이 실패하자 우리아를 고의로 극렬한 전장에 고립시켜 죽게 하였습니다. 자기 손으로가 아니라 적군의 손을 빌어 부하를 죽였습니다. 죄를 숨기려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죄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그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적인 살인까지 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았을 때 모든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파렴치하고 악랄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정직한 회개를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에 다윗의 이름이 880개절에 1043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정직한 내 종 다윗”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 다윗 이후에 많은 악한 왕들이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악한 왕들을 꾸짖으실 때 내 종 다윗같이 정직하지 않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누구나 죄를 짓지만 정직한 회개를 하기보다는 남을 탓하기가 쉽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죄를 범한 것에 대하여 아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거짓됨과 가증함과 속됨을 인정했습니다. 자기의 거짓이 탄로 난 후에 어떻게 될까를 걱정하는 것은 정직이 아닙니다. 사울은 그 점을 염려하다가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기뻐하시는 데 우리는 거짓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을 원하시는데 우리에게는 정직이 없고 진실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 하면 진실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였습니다.
다윗은 죄를 감추는 것은 미련함이고 죄를 고백하는 것은 지혜로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비록 죄를 범하였지만 신속하고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놀라운 결단입니다. 축복의 결단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참으로 무엇보다 귀한 결단입니다. 그 회개의 결단을 통해 다윗은 성경적 인간 실존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하였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시편 51:10).
여기 창조라는 말에 우리가 주의하여야 합니다. 창조란 본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실은 본래 우리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진실과 정직이란 본래 내 마음 속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셔야 합니다.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주셔야 합니다.
정직은 복원 근원입니다. 정직은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불행의 씨앗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너무도 잘 아는 영국 속담입니다.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라. 한 해를 행복하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러나 평생 동안 행복하려면 정직하여라.”
숨은 진실과 정직은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낭중지추(囊中之錐)되어 드러날 것이고, 다윗이 정직한 다윗이라는 별명을 얻었듯이 우리 또한 유명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 정직한 아무개라는 별명을 얻는 것이 참 영예와 복이 될 것입니다.
▶️ 囊(주머니 낭)은 형성문자로 嚢(낭)은 통자(通字), 嚢(낭)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襄(양, 낭)의 생략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囊(낭)은 ①주머니 ②자루(헝겊 따위로 길고 크게 만든 주머니) ③불알, 고환(睾丸) ④주머니에 넣다 ⑤싸서 동여매다(두르거나 감거나 하여 묶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원생동물이 몸 표면에 단단한 막을 분비하고 휴지 상태로 돌아간 것을 낭자(囊子), 주머니 속을 낭리(囊裏), 주머니 속이 텅 빔을 낭핍(囊乏), 주머니란 뜻으로 채우다와 함께 쓰임을 낭탁(囊橐), 주머니 속에 넣어 물건을 간직함 또는 그런 물건을 낭저(囊儲), 주머니 칼을 낭도(囊刀), 주머니 안을 낭중(囊中), 주머니처럼 생긴 형상을 낭상(囊狀), 불알에 나는 종기를 낭옹(囊癰), 주로 여행이나 야유회 등을 갈 때 필요한 물건을 넣어서 등에 질 수 있도록 만든 두 개의 멜빵이 달린 자루 모양의 물건을 배낭(背囊), 안장 뒤 좌우 쪽에 다는 승마대가 쓰는 마구를 여랑(旅囊), 음력 정월 첫 해일에 임금이 근신에게 하사하던 비단 주머니를 해낭(亥囊), 염통 주머니를 심낭(心囊), 사슴의 불알을 녹낭(鹿囊), 지혜가 많은 사람 또는 슬기 주머니를 지낭(智囊), 겹으로 된 천 사이에 솜이나 깃털 따위를 넣고 자루 모양으로 만든 침구를 침낭(寢囊), 모이 주머니를 소낭(嗉囊), 쓸개를 담낭(膽囊), 불알을 신낭(腎囊), 허리에 차는 주머니를 패낭(佩囊), 남의 주머니를 채어 감을 표낭(剽囊),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에 지닌 물건을 꺼낸다는 뜻으로 아주 쉬운 일 또는 손쉽게 얻을 수 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낭중취물(囊中取物) 등에 쓰인다.
▶️ 中(가운데 중)은 지사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물의 한가운데를 상하로 통하는 세로 금으로 중심, 중앙을 뜻함과 형제를 위로부터 차례로 伯(백), 仲(중), 叔(숙), 季(계)라고 일컬을 때의 仲(중)으로서 쓰인 것이다. 또는 깃대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그래서 中(중)은 (1)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의 뜻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하고 있는) 과정임을 나타냄 (2)등급 같은 것을 上中下(大中小)로 구분할 경우 그 가운데 등급 중등(中等) (3)중국(中國) (4)장기판에서 끝으로부터 둘째의 가로줄을 이르는 말 (5)마음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가운데 ②안, 속 ③사이 ④진행(進行) ⑤마음, 심중(心中) ⑥몸, 신체(身體) ⑦내장(內臟) ⑧중도(中途) ⑨절반(折半) ⑩장정(壯丁) ⑪관아의 장부, 안건(案件) ⑫가운데 등급(等級) ⑬중매(仲媒), 중개(仲介) ⑭중국(中國) ⑮버금(으뜸의 바로 아래), 둘째, 다음 ⑯가운데에 있다 ⑰부합하다, 일치하다 ⑱맞다, 맞히다, 적중시키다 ⑲급제하다, 합격하다 ⑳해당하다, 응하다 ㉑뚫다 ㉒바르다, 곧다 ㉓가득 차다 ㉔이루다, 이루어지다 ㉕고르다, 고르게 하다 ㉖간격을 두다 ㉗해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바깥 외(外)이다. 용례로는 중도에서 끊어짐을 중단(中斷), 한가운데를 중심(中心), 사방의 중심이 되는 곳을 중앙(中央), 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나 자리 중추(中樞), 길을 가고 있는 동안 도중(途中), 일이 되어 가는 동안 중도(中途),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라는 낭중지추(囊中之錐), 짙은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오리무중(五里霧中), 바둑을 두는 즐거움을 이르는 말을 귤중지락(橘中之樂), 우물안 개구리라는 정중지와(井中之蛙), 웃음 속에 칼이 들어 있다는 소중유검(笑中有劍), 술잔 속의 뱀 그림자라는 배중사영(杯中蛇影), 그림 속의 떡이란 뜻의 화중지병(畫中之餠),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의 추처낭중(錐處囊中), 공중에 세워진 누각이라는 공중누각(空中樓閣), 삼밭에 나는 쑥이라는 마중지봉(麻中之蓬), 가마솥 속에서 논다는 유어부중(游於釜中), 열에 여덟이나 아홉이라는 십중팔구(十中八九), 같은 패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자중지란(自中之亂), 말 속에 뼈가 있다는 언중유골(言中有骨), 우물 속에 앉아서 좁은 하늘을 바라본다는 정중관천(井中觀天),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찾는다라는 암중모색(暗中摸索), 솥 속의 생선이라는 부중지어(釜中之魚), 웃음 속에 칼이 들어 있다는 소중유도(笑中有刀), 백 번 쏘아 백 번 맞는다는 백발백중(百發百中), 터무니없는 말로 헐뜯거나 남을 해치려고 속임수를 써서 일을 꾸민다는 중상모략(中傷謀略)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 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錐(송곳 추)는 형성문자로 锥(추)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쇠 금(金; 광물, 금속, 날붙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가시 모양으로 가늘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隹(추)로 이루어졌다. 쇠를 가시 모양으로 가늘게 한 것의 뜻이다. 그래서 錐(추)는 ①송곳 ②바늘 ③침(針: 바늘) ④작은 화살 ⑤뾰족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밑바닥과 평행하는 평면으로 원추를 베었을 때의 그 벤 자리와 밑바닥과의 사이에 남는 입체의 부분을 추대(錐臺), 송곳의 끝을 추망(錐芒), 송곳의 자루를 추영(錐穎), 한 정점을 지나되 그 점을 포함하지 않는 평면위의 한 폐곡선의 각 점을 지나는 직선군에 의하여 생기는 면 뿔면을 추면(錐面), 하나의 추면과 하나의 평면으로 둘러싸인 입체를 추체(錐體), 도자기의 몸에 송곳 끝으로 파서 새긴 것처럼 된 무늬를 추화(錐花), 추화의 무늬를 놓아 만든 도자기를 추기(錐器), 남포 따위를 터뜨리기 위하여 뚫어 놓은 구멍을 추공(錐孔), 쇠붙이로 만든 화살촉을 추시(錐矢),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의 추낭(錐囊), 끝 부분이 모가 진 송곳을 우추(隅錐), 땅 속 깊은 곳의 구조를 알아보거나 지하자원의 채취나 토목공사 등을 하기 위하여 땅속에 구멍을 깊이 뚫는 작업을 시추(試錐), 모뿔을 각추(角錐), 한 광원으로부터 어떤 면 위로 모여 가는 빛의 속선을 광추(光錐), 칼과 송곳 또는 작은 이익을 도추(刀錐), 털붓을 모추(毛錐), 활같이 굽은 나무에 시위를 매고 그 시위에 송곳 자루를 건 다음 당기고 밀고 하여 구멍을 뚫는 송곳을 무추(舞錐), 끝이 네모진 송곳을 방추(方錐), 송곳을 세움 또는 송곳을 세울 정도의 좁은 공간을 입추(立錐),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추처낭중(錐處囊中), 뾰족한 칼의 끝이라는 뜻으로 아주 작은 사물이나 얼마 안 되는 이익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추도지말(錐刀之末) 등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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