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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heatingkim 2018. 8. 20. 00:06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비석(碑石)’하면 우리는 만주벌판에 서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떠 올리지만,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석이 서울 한복판

국립고궁박물관 과학실에도 우뚝 서 있다.


조선조 태조 4년(1395)에

고구려 시대 평양에서 각석한

천문도(‘평양 성도()’)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돌에 새긴

천문도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

바로 그것이다(태조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 천문도

가운데 하나로써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유산이며,

세계적인 보물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하늘의 모습 ‘천상’을 ‘차’와

‘분야’에 따라 벌려놓은 ‘그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차’란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설정한

적도대의 열두 구역을 말하고,

‘분야’란 하늘의 별자리 구역을

열둘로 나눠 지상의

해당지역과 대응 시킨 것을 뜻한다.


이 비석의 뒷면에도

전면과 똑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지만

일부 내용의 배치가 바뀌고

세련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세종 15년에 복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세종본).


이 비석이 마모되자

숙종 13년(1687)에 원형보존을 위해

상태가 좋은 탁본을 바탕으로

이민철(, 1669년 현종 10년에 수력식 혼천의 제작)이

새로 복각하였다(숙종본).

영조 46년(1770)에는 관상감 안에

흠경각을 지어 이 두 개의 비석을 함께 보존하여 왔다.

1908년에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으로 옮겨져

창경궁 명정전에 70년대 초까지 보관되어 왔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이야기

조선 태조 이성계왕이

조선을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한 노인이 고구려 천문도라는 탁본을 올렸다.

천문도를 새긴 비석은 평양에 있었는데

전란 중에 대동강에 빠뜨려 잃어버리고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인본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하였다.

 

당시 태조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는 받았지만

아직 국왕으로서 책봉되지 못한

‘권지국사()’로 지내던 터에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만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징표가 손 안에 들어 온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하루 속히 만천하에 알리고 제도를 개혁하고 싶어

(이를 수명개제[]라 한다.)

주옥 같은 천문도를

서운관에 보내 돌에 다시 새기도록 하였다.


막상 돌에 새기려다 보니

고구려 천문도가 만들어진 이후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별자리가 이동하여

시간측정의 기준이 되는 중성기가 어긋났다.

서운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추산(천문계산)을 담당했던 유방택()과

물시계 관리자()인 전윤()과

김자수() 등은 한양의 자오선에 맞춰

중성(이십팔수 가운데 해가 질 때와 돋을 때에

하늘의 정남쪽에 보이는 별. 혼중성, 효중성을 말함)을

추산하여 중성기를 개수하였다.


고구려 당시 평양의 하늘을 지났던

중성기가 한양의 중성기로 바꾸었다

(이것에 따라 1398년

물시계인 경루()를 제작하고

새벽과 황혼을 알리는 대종()을

종루에 걸고 표준시각을 알렸다.)


개수가 끝나자

권근()은 천문도 탁본의 유래,

중성기의 개수, 관상수시의 중요성,

조선왕조의 개창과 경천근민의

실천 등이 담긴 천문도지()를 짓고,

설경수()가 글씨를 썼다.


자료출처:~<네이버 지식백과>에서~




2    0    1    8.    8.    1    7.     시      곡(枾     谷).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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