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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지원의 장애인 상 / 우외호

heatingkim 2017. 2. 14. 11:48


박지원의 장애인 상


 대표 상상가인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장애인을 보는 시각이 남다르다.

어느 날 장애인이 된 ‘김홍연’이 박지원의 우거(寓居)에 찾아가 이런 부탁을 했다.

“제가 이미 늙어 머잖아 죽을 터인데, 마음인즉슨 진작 죽었고

머리카락만 남아있을 뿐이며, 거주하는 곳은 모두 중들의 암자입니다.

바라건대 선생님의 문장에 의탁해서 후세에 이름을 전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박지원은 김홍연이가 늙어서도 그 뜻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까웠다.

박지원은 마침내 그 옛날 자연을 벗 삼아 함께 노닐던 객과 주고받았던 말을 써서

보내주면서 그 글 끝에 같은 게(偈)를 붙였다.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 새를 의아해하네

흑백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하니

하늘도 판정하길 싫어 한다지


사람들 모두 두 눈 있지만

한쪽 눈 없어도 또한 본다네

하필 두 눈이 있어야 밝게 보일까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도 있는데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여겨

이마에 눈 하나를 보태기도 하네


또한 저 관음보살은

변신하여 눈이 일천개라지

천 개의 눈을 어디 쓰지

장님도 검은 것은 볼 수 있다마다

김군은 병들어 몸이 불편해

부처에 의지해 연명한다지

돈을 쌓아 두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중생들 제각각 살면은 되지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

대심(大深)이 뭇 사람과 다르다 보니

이 때문에 의아히들 여기는 게지


 ‘게’는 ‘게송(偈頌)’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미하는 시를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연암이 김홍연을 위로 격려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이 ‘게’의 형식을 끌어다 썼던 것이 아닐까?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 새를 의아해하네’ 라는 구절은

까마귀는 자기가 검으므로 다른 새들도 다 검다고 믿으며,

백로는 자기가 희므로 희지 않은 새들을 보면서 의아해한다.’는 말이다.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 운운하고 있다. 그것은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눈이

하나 뿐인 사람들만 사는 일목국(一目國)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렇다면 연암은 중국고대의 책인 산해경을 읽었다는 것이다.

‘제가 이제 늙어 머잖아 죽을 터인데 로 시작되는 김홍연의 말은 너무나 처량하다.

한때 협객으로 날리며 멋지게 살던 그가 어찌 이리 됐나 싶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름에 의 집착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집착은 김홍연의 비참한 처지와 관련이 있다.

김홍연은 몰락한 이후부터 자기 이름을 후세에 전해야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히게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회한과 자기 보상에의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며,

게다가 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은 장애인이 되고 말았으니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이 ‘게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 속에 장애인에 대한 연암의 깊은 숙고가 발견된다.

이하의 세 줄은 ‘박희병’의 (연암을 읽는다)에서 저술한 내용이다. 

‘까마귀는 자기가 검으므로 다른 새들도 으레 다 검은 줄로만 알고,

백로는 자기가 희므로 희지 않은 새들을 보면서 의아해한다.’

여기서 박지원의 깊은 사고를 헤아릴 수 있다.

까마귀와 백로의 비유는 자기중심적인 판단, 자기중심적인 인식의 국한성내지

부당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흑(黑)이다, 백(白)이다. 옳고 그르다고 말하며 싸우지만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옳음도 그름도 정상도 비정상도 없이 다 똑 같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식과 판단은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건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 자기만이 옳고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편견일 수 있으며,

모든 사물은 평등하되 다만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박지원이 까마귀와 백로를 통해 말하고자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사람들은 대게 눈이 둘이다. 하지만 눈은 꼭 둘만은 아니다.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눈이 하나인 사람도 있고,

눈이 세 개인 사람, 눈이 천 개인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꼭 눈이 두 개인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눈이 두 개인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할 경우 그런 사람만이 옳고 나머지는

다 옳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눈이 두 개라고 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나은 것도 아니란 것이다.

보이지 않은 장님도 그 나름대로 사물을 보고 느낀다.


심안(心眼)]즉,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의 눈이 보통 둘이라는 이유 때문에 눈이 하나인 사람이나

장님을 비정상적으로 간주하거나 얕잡아 보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눈이 둘인가, 하나인가, 장님인가는 다만 차이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반드시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란 것이다.


 박지원의 이 게 는 병 때문에 ‘폐질인’ 이 된 김홍연의 처지를 위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할 문제는 이 게가 보여주는 시선이 한갓 동정의 시선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 한국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아주 심하다.

박지원의 이 게에는 장애인을 보는 독특한 시선, 오늘 날의 우리가 경청해야할

문제이다. 그건 곧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설정을 허물어 버리는 시선이다.

장애인을 보는 박지원의 시선에는 정상/비정상의 엄격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우열(優劣)로 위계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장애를 보는 박지원의 이런 시선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 대해

박지원이 견지했던 저 도저한 상대주의적 인식 태도의 관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상대주의적 인식 태도가 차별과 독선과 자기중심성에 기초해 있던

당대 조선의 현실 주자학 및 문화 패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성격을 다분히

갖는다는 점 ,그리고 불교와 장자 사상의 수용을 통해 다양성을 긍정하면서

편견이나 차별 심을 넘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요컨대 우리는 장애인을 보는 시선의 문제에 있어서도 박지원의 남다른 비판적

통찰과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정말 어리석다. 자신도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되어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모습만 다를 뿐임을 인정하지 않고

근본(根本)이 틀린다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TV를 보면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별하여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억압하여 부당한 대우를 할 권리가

없다고 할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긍정이 비장애인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도 아니며,

비장애인에 대한 긍정이 장애인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둘 사이에 가치의 우열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 따라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면 된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배제 하거나 차별할 근거도 없다.

차이를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가기 가 가장 이상적이 사회이다.

비록 장애인이지만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많다. 비장애인이라고 하여

정신적인 장애인을 가진 사람을 정상인이라 할 수는 없다.

인격 장애가 신체적인 장애보다 더 큰 사회적 문제임을 직시해야한다.

편견과 차별을 해소하고 더불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든 신체적 건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후천성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01.The moon's a harsh mistress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유당(幽堂)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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